한국적 세계

그래서 저는 20세기에 형성된 객관이라는 가치를 믿지 않습니다. 마치 갓을 쓴 상놈들이 공자왈하는 것 같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철저히 독재·권위주의 정부에 종속되어 온 한국 언론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야 객관과 중립을 치켜세우는 모습은 마치 범죄자가 알리바이를 만드는 과정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게 본인들의 과거를 물타기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 언론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그 궤를 같이해 왔습니다. 독재·권위주의 정권 때는 권력의 나팔수들이었습니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늘 소수였습니다.

권력이 시장에 넘어간 이후에는 재벌, 대기업 광고주 친화적이었습니다. 원자재값이 올라 건설사들 건축비 올리는 건 시장경제라고 말하면서 인플레이션에 따라 직장인, 노동자 월급이 올라가는 건 극렬하게 반대합니다. 노동자의 파업은 집단 이기주의이고, 재벌들이 투자 안 한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정부가 법인세 낮추고 규제 완화해야 한다고 선전합니다. 대주주 아들의 경영권 불법 승계를 마치 당연한 모습인 양 묘사하기도 합니다. 언론은 자본주의를 주창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탈세, 편법, 부조리에 대한 옹호일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기자 본인들도 불법적 행태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공무원, 기업인에게 촌지도 받았고, 공짜 여행도 갔고, 명품 스카프나 구두도 받았습니다. 설, 추석 같은 명절 때 이른바 ‘물 좋은 출입처’에 출입하는 기자들 집에는 관공서, 기업 등이 보내온 선물이 쌓여 현관문을 못 열 지경이 됐습니다. 그게 관행화되자 회사 경영진은 협찬 많이 받아오고, 각종 포럼 이벤트 행사의 티켓을 많이 팔아오고, 광고 많이 따오는 기자들에게 정식 인센티브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이미 직장인이 됐습니다. 딱히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직장인이 된 기자들이 이 사회에 어떤 효용을 주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는 명확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자들이 제공하는 기사의 대부분은 정부나 기업, 정치인들이 말이나 보도자료에 의존하기 때문이죠.

정부나 기업, 정치인들이 알리고 싶어하는 정보나 가치 신념을 홍보하는 건 그들의 일입니다. 그들은 할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걸 그대로 받아쓰는 건 기자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수 기자들이 받아만 쓰지요. 그럼 기자가 한국 사회에서 생산하는 부가가치는 무엇인가요?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그냥 홍보물을 직접 대중에게 뿌리는 게 낫지요.

딱 하나. 홍보담당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언론에 대한 독자나 시청자들의 오래된 믿음 때문이지요. 정부, 기업, 국회의 홍보나 PR 담당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언론사에서 기자들이 말하면 객관적으로 들린다는 것을. 그래서 주관은 객관을 손쉽게 참칭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린대로 원래 객관이란 없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객관은 가짜이거나 유사한 것일 뿐입니다.

꿈

길어졌네요. 이 지면에 모든 걸 담을 수는 없겠습니다. 재단에서 A4 2장이라는 분량을 정해줬기 때문입니다. 마치 48면이라고 정해진 신문지면이나 58분이라고 정해진 다큐 편성시간처럼 말이지요. 형식은 내용을 규정합니다. 그 형식 안에 갇힌 인간은 또 딱 그만큼만 말할 수 있습니다. 단지 형식뿐일까요?

그러나 대중은 형식을 포함한 모든 억압적 기제로부터 자유로운 언론을 원합니다. 사실 언론인들도 그걸 꿈꾸지요. 그러나 그건 고상한 담론일 뿐입니다.

한국 언론은 돈이나 받지 말아야겠습니다. 명품 스카프, 구두나 받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출입처에서 가만히 받아쓰는 게 기자의 모든 일인 양 착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기자의 본업은 정부, 기업, 국회의 홍보 담당자들의 말이나 보도자료를 검증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드는 이 세상을 좀 더 진실에 근접하도록 하는 과정에 본인들이 어떤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사명감 같은 건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마구 받아쓰기 전에 좀 생각도 하고, 혼자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취재하고 사유한 다음에 글을 쓰는 기자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독자나 시청자들도 그런 기자들의 생산물을 읽고 보고 응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딱 그것뿐입니다.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본업에라도 충실합시다. 제가 바라는 꿈은 딱 그 정도입니다.

제작: 백진수(홍보콘텐츠팀)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역사입니다. 세상을 바꾸자, 어떻게 바꾸냐, 제도를 바꿔야 한다. 제도를 어떻게 바꾸냐. 생각을 바꿔야 한다. 생각은 누가 바꾸냐. 교육을 잘해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다. 그래야 세상이 달라진다. 이렇게 얘기하죠. 사람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세상을 움직인다. 그러면 사람의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역사의 경험이 우리의 사상을 형성하는 가장 결정적인 기초이다. 교과서에서 가르친 것은 분명히 ‘정직해야 한다. 그래야 복을 받는다’ 이렇게 가르쳤는데 이 현명한 아이는 어느새 어디서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직하면 손해 본다는 것에 동그라미를 치고 있다는 거죠. 경험이죠.

일제 시대를 경험했던 사람들, 6.25를 경험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생각은 여러분들과 생각이 한참 다릅니다. 다른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에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정의의 깃발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서 승리하고 그 승리의 결과를 자손들에게 물려준 역사가 있습니까?

‘훌륭했다’, ‘정의롭게 살았다’, ‘모범적으로 살았다’ 하는 사람 중에는 현실 정치에서 성공한 사람이 없는 것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제가 대통령 후보가 되고 난 뒤에, 아니 되려고 할 때 ‘당신 미국에 가 본 적 있느냐’ 질문을 받았습니다.

‘안 가봤소’

‘왜 안 갔소’

‘바빠서 안 갔소’

실제롭니다. 제가 13대 국회의원 됐는데 난 노동위원이었습니다. 노동위원이 미국 갈 일이 뭐가 있습니까. 없어요.

저기 사우디아라비아인가 그쪽에 우리 노동자들 나가 있는데, 그쪽에 한 번 갔다 오라고 합니다. 근데 가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로 할 일도 없는 것 같고, 돈이 아까울 것 같아서 안 가버렸습니다.

미국 안 갔다고 다 반미주의자입니까? 또 반미주의면 어떻습니까? 제가 그 말을 하고 보니 반미주의자면 어떻습니까? 이건 좀 곤란합니다. 그죠?

말을 하다 보니 그리됐는데, 어떻든 왜 그 얘기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냐 이겁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머릿속에 당연한 것처럼 박혀 있는 우리의 의식 구조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건가, 우리 역사로부터 비롯돼있습니다.

세상을 바꾸자면 우리 생각을 바꾸자면 역사를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나온 역사에 대해서 새롭게 해석을 하고, 그리고 지금부터 우리가 만들어 가야 될 역사에 대해서 새롭게 계획을 세워야 된다. 역사, 역사를 다시 쓰자. 그렇게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